[한국선교사 열전] 40-1 James E. Adams (제임스 아담스, 안의화) 선교사 ①
- 작성자 : Henry Park
- 20-06-20 19:14
James Edward Adams, 안의화 선교사 1895년 입국
안의와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 부인 넬리와 아들 에드워드
안의와 선교사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맥코이(McCoy)에서 태어나, 1888년 캔자스(Kansas)주
토피카(Topeka)의 워시번 대학(Washburn College)을 졸업하였다. 그후 1년간 존 홉킨스 대학(John Hopkins University
)에서 수학하고 맥코믹(McCormick) 신학교에 들어가 1894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YWCA 간사로 일하던 넬리 딕(Nellie Dick)과 결혼하였고, 그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부터
조선(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 5월 29일 가족들과 함께 누나가(안애리 선교사, 배위량 선교사와 처남, 매부
사이) 활동하고 있던 부산에 도착하여 조선(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대구 선교를 인계받은 후
즉시 대구에 부임하지 않고 부산에서 한국어를 습득하고 선교사 실습을 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897년 11월 1일 가족들
(부인 Nellie Dick Adams(1866~1909), 아들(Edward))과 어학 선생 김재수(金在洙, ?~1941), 그리고 출산을 앞둔
부인을 위해 동행했던 임시 보모(Marie Chase)와 함께 대구에 도착했다.
안의와 선교사가 대구에 부임한 다음 달인 1897년 12월 의사인 존슨(Woodbridge O. Johnson, 1869~1951) 장인차
(張仁車) 선교사 부부가 도착하였고, 1899년 5월 부해리(傅海利) 선교사가 대구의 세번째 선교사로 임명되어, 10월 26일
부임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대구 선교기지가 개설되었다. 이것은 한 선교기지 내에 선교사가 최소한 3명이 되어야 독립된
선교기지로 공인받을 수 있고, 독립적인 예산 편성권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구 스테이션의 개설은 대구가 대구·
경북 지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지역 개신교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1897년 말 자신과 함께 대구에 온 가족과 어학 선생, 임시 보모 등 7명을 교인으로 남문안 교회(현 대구
제일교회)를 창립하였다. 이것이 대구·경북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후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여 1900년 봄 존슨
의사의 조수 서자명(徐子明)과 정완식(鄭完植), 김덕경(金德卿) 등이 출석하여 세례를받았고, 이듬해부터 교인이 급증하여
1907년에는 8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회당 신축 문제가 시급하여 1907년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른 1908년 8월의 태풍으로 건물이 붕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교인 7명으로 시작한 대구 제일교회는 1994년 4월 동산(東山) 위에 웅장한 교회당을 신축하였다. 이처럼 크게 성장하여
현재까지도 대구·경북지방 모(母) 교회로서의 위치를 굳게 지키고 있다. 교회가 위치한 동산(東山)은 선교 초창기의 선교사
들이 처음으로 자리잡았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며, 지금은 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신명학교, 동산 의료원 등이 함께
위치하여 현재도 대구의 개신교 중심지로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개신교 교회는 선교의 일환으로 의료와 교육
사업에 힘썼는데, 이는 근대 서양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던 당시 우리나라의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다.
대구에서 최초로 병원이 설립된 것은 1899년 존슨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결혼한 지 두 달 만인 1897년 존슨 선교사는 부인
파커(EdithM.Parker)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3일간의 힘든 여행 끝에 대구에 닿았다. 그후 팔공산 파계사(把溪寺)에서
한국어를 익힌 후 1899년 대구에 온 부해리 선교사와 협력하여 그해 성탄절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병원을 개원 하였다. 이것이 현재의 ‘계명대학교 부설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하였고, 동산의료원에서는 지난 1999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옛 선교사들의 주택을 적극 활용하여 ‘의료,선교박물관’
을 개관하였는데, 이는 대구 지역 개신교의 역사 자료를 종합 재정리하고, 이를 통해 선교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작은 초가집 한 채를 수리하여 열악한 시설과 의료 도구로
출발한 병원은 그후 100년만에 급속한 성장을 거듭하여 대구,경북지방 최고의 의료진과 시설을 갖추고 뛰어난 임상 성과를
거둔 국내 유수의 병원이 되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된다.
안의와 선교사는 1912년 6월 미국 캔사스(Kansas) 주 오구한 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23년
병으로 대구를 떠날 때까지 경북 곳곳에서 선교활동을 펴 수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계성학교(啓聖學校)를 비롯하여
많은 학교를 세워 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부터 시작된 아담스 선교사의 사역은 건강
악화로 1924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약 23년 간 계속되었다. 그의 선교 구역이었던 대구 동쪽 지역에 세워진 많은 신생
교회들은 그의 손길을 요구하였다. 직접 설립한 계성학교 역시 그의 지도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었다. 선교 영역은
날로 늘어 만 갔지만 사역자들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본국에 더 많은 선교사들을 요청했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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