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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역사 아카이브] 7. 한부선 선교사와 고신의 협력 선교사들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7. 한부선 선교사와 고신의 협력 선교사들

한상동 목사가 고려신학교를 설립할 때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한 달 후 한부선 선교사가 입국해 협력하면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았다. 그가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할 때나 평양감옥에서 만주에서 같은 일을 했던 한부선 선교사에 대해 들었을 것이지만, 해방 후 입국한 다음날 처음 만났고, 교수로 봉사해 줄 것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은 한위렴 선교사의 장남으로 평양에서 출생한 자칭 ‘메이드 인 코리아’ 선교사로, ‘가장 한국적인 미국선교사’이다. 그는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솔단고등고등학교를 마치고 휘튼대학을 거쳐 럿거스대학을 졸업한 후 1924년 프린스톤신학교에 입학, 메이첸 교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928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뉴브룬스윅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아버지를 이어 제2대 선교사로 파송받아 청주에서 사역하였다. 1932년 방위량(William N. Blair) 선교사의 딸 캐더린과 결혼하였고, 1936년 안식년 때는 미북장로교회를 탈퇴하고 미국장로교(후일 정통장로교회)가 조직될 때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그는 장로교해외독립선교부 소속으로 만주 하얼빈에서 선교하였고,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던 제27회에 참석해 강력한 반대로 결의의 절차적 부당성을 ‘항의합니다’고 외치다가 경찰에 끌려나갔다.

그는 1939년 9월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교회와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언약문서 작성, 신사참배 반대에 이론적 체계를 잡았지만, 봉천노회에서 제명을 당하였다. 1941년 10월 22일 체포되어 단둥의 형무소에 투옥, 선고 유예를 받고 풀려났고, 일본이 진주만 습격을 하면서 다시 체포되어 심양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미국과 포로교환 형식으로 추방되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1946년 입국해 1946년 11월 5일에 첫 경건회 설교를 한 이래 평생 고려신학교와 함께했다. 그는 고려신학교 교수로서 헬라어, 교회사, 호세아, 에베소서, 교회정치, 설교학, 영어회화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고, 신학교 행정을 적극 지원했다. 그가 설교를 하고 사례를 받으면 전액 신학교에 입금하였고, 고려신학교의 국제교류와 도서 확충에 기여했으며, 신학생들의 멘토가 되었다. 그는 입국 첫해에 379회 설교를 했고, 그의 전도로 결신한 사람이 400-450명이 될 정도로 열정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주한미군을 상대로 청년신앙운동(YFC)을 전개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한국학생들이 훗날 SFC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그는 미국의 교회와 친구들이 꾸준히 보내온 구제품을 공급해 구제와 전도활동을 지원했고, 복음병원 초기에 송도교사 신축과 복음병원 건축에도 협력했다. 그는 효과적인 교회쇄신운동을 위해 출판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파수군’ 발행, ‘진리운동’ 출판, 박윤선 주석 출판을 위해 인쇄용지를 수입할 정도로 교회쇄신운동을 지원했다.

당시 총회에서 그를 ‘메이첸파 선교사’라 했는데, 이는 메이첸이 미국북장로교회를 떠나 미국장로교를 창립한 것과 같은 교회분열주의자라는 낙인이었다. 그는 미국장로교회가 미국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된 후 제27회 총회(1938)에서 다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해방 전에는 ‘메이첸 파’라 비난하지 않았다. 한국교회 최초의 용공 시비문서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에서 “미국의 남북장로교회에서 작당 분쟁을 일삼아 평화와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다가 반역죄로 몰려 축출당한 극소수의 그들(메첸파)의 손에 우리 조선 장로교회를 맡긴다는 것은 조선장로회를 전 세계적인 대 생명체에서 절단하는 것이며 ... 조국을 잊어버리고 타국에 예속하는 공산주의자와 무엇이 다르리요..”라 했다.

이것은 펙트체크를 하면 참 황당한 일이다. 1938년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봉천노회는 ‘신사참배 불복과 만주국 포고령 위반’의 이유로 한부선 선교사를 제명처분했다. 해방 후 제33회 총회(1947)에서 한부선 선교사의 호명을 했을 때, 한부선 선교사는 대답 대신 ‘나는 회원이 아닙니다’라 대답했는데, 이것이 총대들에게 ‘신사참배 한 총회는 더러워서 회원이 되지 않겠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김양선). 그러나 노회의 제명 처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총회의 회원이 될 수 없는 것이므로 어떤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를 뒤늦게 알고 제36회 총회(1950)에서 ‘해벌’을 통고했는데, 총회가 ‘취소, 사과할 일’이지 ‘해벌할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갈등이 심화되어 제34회(1949) 총회는 ‘메이첸파 선교사들과 교류를 금하는’ 결의를 하였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미국장로교회의 분열과 그로 인한 선교사들 사이의 갈등과도 관계가 깊은 것이다. 그는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뉴욕전도대회(1984)에서 선교공로상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 50주년(1979)에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고려신학교 초기에 한부선 선교사 외에도 1948년 3월에 입국한 성경장로교회의 함일돈, 최의손, 마두원 선교사가 고려신학교와 협력하였다. 함일돈(Floyd E. Hamilton)은 1919년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0년 내한한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쳤고, 1926년부터 19년 동안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일했다. 1936년 미국장로교회로 이적했고, 마두원 선교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지원했다. 1953년까지 고려신학교 교수로 가르치며,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였다.

최의손(William H. Chisholm)은 치과의사로 선천 미동병원 원장을 지냈는데, 장기려 박사가 남하 후 보안사에 체포되어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적극 변호, 무혐의로 풀려나게 했다. 마두원(D. R. Malsbury)은 1929년 입국한 최초의 음악선교사로서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김동진, 박태준, 안익태, 한동일, 백건우 등이 한국의 대표 음악가들이 되었다. 그는 함일돈과 함께 성경교회를 개척하였고, 교회교육이 어려울 때 성경공부 교재를 발행하는 교육사업을 하기도 했다. 고신교회는 ICCC의 극단성 때문에 공식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는데, 이들은 ICCC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 1961년 대신측이 분열될 때 그들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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