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16. 교회쇄신운동과 평신도들의 항거
- 작성자 : 나삼진
- 22-03-15 07:18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6. 교회쇄신운동과 평신도들의 항거
한국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고신교회 평신도 운동이 다른 교단보다 강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긍정적인 면은 손봉호, 이만열 등 한국교회 평신도 운동을 이끄는 학자들과 김경래(100주년 기념사업회), 이우준(국제기드온협회), 김창성(기독실업인회) 등 교계연합운동을 이끄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는 긍정적인 면과 함께, 평신도들이 교단 정치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는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역할은 고신교회가 형성될 초기부터 있었던 일이었다. 해방 후 한국교회 쇄신운동에서 목회자들은 출옥성도들의 교회쇄신운동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평신도들의 강력한 지지와 항거가 강력한 원군이 되었다. 여성도들도 그보다도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신사참배 반대운동 당시에 경남노회 부인전도회를 장악하여 여성도들이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최덕지, 조수옥 등은 6년이나 옥고를 치루었다. 박인순 등 여성도들도 고초를 많이 겪었으며,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는 평양에서 거주하면서 투옥된 이들의 옥바라지를 전적으로 담당하였다. 평신도들의 항거, 여성도들의 헌신, 순수한 학생들의 회개운동이 있었기에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1940년대 초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이 친일과 부일을 일삼아 처참한 모습이었다. 교회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해 절하고 에배했으며,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고 임금이 있는 동방요배를 하였고, 헌금은 무기를 구입하는 일에 보내어졌으며, 유기그릇과 교회 종은 무기 제작을 위해 강제적으로, 때로 자발적으로 공출되었다. 이에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한상동 목사 등이 권고하였던 것과 같이 교회에 나가지 않고 가정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세월을 보내었다.
해방 후 다수의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러한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이를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일청산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면, 이러한 부끄러운 일을 회개하는 것은 교회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의 친일청산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 같이, 기독교계에서의 교회쇄신운동도 온전히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던 사람은 감옥으로 갔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목회에서 물러난 사람들도 많았다. 투옥된 사람들은 50여 명이 순교하였고, 출옥한 성도들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이 경남지역에서 전개될 때 친일부일에 적극 가담하였던 이들은 강력 저항했고, 부끄러움과 수모를 어쩔 수없이 견딘 사람들은 그 부끄러운 역사를 회개하고 청산한 사람도 있었지만,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역학관계에서 생존을 모색한 사람도 있었다. 해방 후 출옥성도들은 소수였고, 소극적인 협력자들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자숙과 교회 사임 등 쇄신방안을 마련하였지만, 김길창 등 노회한 목회자들은 스스로 마련한 쇄신방안을 교묘히 파기시켰다.
출옥성도들은 소수의 젊은 목회자들이어서 정치적 힘이 없었다. 손양원은 아직 안수도 받지 않았던 때였는데, 그가 안수받을 때에 노회에서는 김길창 목사가 강단에서 내려가 안수받도록 요구, 참석한 평신도들이 이에 항의하여 강단에서 안수를 받게 했을 정도였다(최종규 증언).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했던 측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친구였던 이약신 목사가 노회장으로 영향력을 가지고 4년 동안 경남(법통)노회를 이끌었는데, 총노회가 조직되어서도 총노회장으로 세 차례, 총회로 승격된 후 총회장을 맡아 봉사했다.
경남노회에서 교회쇄신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출옥성도들을 지지, 동참, 협력하였던 평신도 그룹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교회마다 부흥사경회가 활발하였고, 평신도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회개운동과 교회쇄신운동에 동참하였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시절 전통적으로 겨울 농한기에는 집회가 주로 열렸지만, 해방 후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교회마다 집회를 열고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남선, 한상동, 이약신, 박윤선, 손양원, 윤봉기, 이인재, 황철도 목사 등이 대표적인 강사들이었다. 평신도들은 이불과 쌀을 지고 가서 한 주 동안 집회에 참석해 부끄러운 과오를 회개하고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무장되었다. 교권주의자들은 이들의 회개와 항의를 외면하거나 박해하고,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함으로 서문로교회, 성남교회(현 성동), 구포제일교회, 김해중앙교회, 경주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또 면려청년회에 속한 청년들이 교회쇄신운동에 동참,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들은 1947년 11월 15일 ‘면려청년’이라는 간행물을 창간하여 교회쇄신운동에 함께 했다. ‘면려청년’에는 교계 소식, 지도자들의 신학적인 논설이나 주장, 각 교회의 부흥회 소식까지 등사 인쇄로 소식을 날랐다. 회장 권성문 장로와 총무로 정홍석 목사가 이 일에 앞장섰다.
아울러 고려신학교와 교회쇄신운동을 박해하는 총회측에 대한 평신도들의 항거는 평신도대회를 통해 나타났는데, 제1회 청년대회(1949. 8. 25-30), 제2회 청년대회(1951. 7), 제3회 청년대회(1951. 11. 27-30)를 개최하면서 교회쇄신운동이 흔들릴 때마다 교권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평신도들은 노회와 총회의 결의에 민감한 관심을 가졌고, 잘못된 결의에 항거하며 이를 시정하려 하였다. 1951년 5월 신도대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격려사를 받기도 했다.
제36회 총회(1950. 4. 21-25, 대구제일교회)는 전권위원 보고를 받는 중요한 총회였기 때문에 평신도들 500명이 총회에 방청했고, 총회가 정상적으로 회집되지 못하고 정회한 다음날이던 4월 24일 신도대회를 열어 제36회 총회에서의 폭행을 고발하고, 주동자 이갑철(전북노회 총대), 주수겸(경기노회 총대), 이홍필(경남3분노회 비총대) 등에 대하여 적당한 치리를 하도록 진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 신도대회 후에는 총회 소식, 발표된 성명서, 총회와 신도대회 소식을 담아 총회 휴회 후 바로 ‘면려청년’ 임시호(1950. 5. 1)를 발행, 전국교회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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