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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18. 교회쇄신운동의 확산과 각 지역의 중심교회들


다큐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

18. 교회쇄신운동의 확산과 각 지역의 중심교회들

출옥성도들은 평양형무소에서 제2차 세계대전 말엽에서부터 해방 후를 내다보며 신사참배 강요에 무너진 ‘대한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고려신학교 설립과 교회쇄신운동은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던 것과 같이(왕상 19:18), 곳곳에 신실한 협력자들이 있어 성공할 수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가 발회될 때 경남(법통)노회가 중심이 되고, 대구(1952. 12), 경안(1953. 1), 전라 등 세 지방회로 구성되었다. 교회쇄신운동은 각 지역으로 확장되었고, 그 중심교회들이 각 지방의 어머니교회가 되었다. 1954년 제3회 총노회는 경기지방과 전라지방에 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해, 고신교회는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신교회의 형성과정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는 부산남교회였다. 신학교 교수가 부족할 때 수산교회 박손혁 목사에게 강의를 맡기기 위해 한명동 목사는 영도교회를 그에게 물려주고 행정과 기숙사 관리를 맡으면서, 1949년 고려신학교 강당에서 부산남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1951년 9월 교회당 신축기성회를 조직하고 건축을 준비했는데, 천사당 제과점을 운영하던 박봉화 집사가 중심이 되고, 건축업을 하던 이종식 집사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봉사하였다. 부산남교회는 1952년 3월 2일에 기공하여 1953년 9월 20일 입당하여 첫 예배를 드렸다. 당시 부산시청 앞 광복동 입구에 개척 3년만에 대형 목조건물을 건축한 부산남교회는 첫 30년 동안 총회 17회, SFC수양회 14회를 봉사하였고, 교회는 신학교 졸업식과 잦은 교단 행사로 고신교회의 본산과 같았다.

부산지역에서 삼일교회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일교회는 한상동 목사가 초량교회 성도들 95%의 지지를 받았으면서도 교회 분쟁으로 인해 믿지 않는 이웃에게 전도의 문이 막히지 않도록 건덕을 위해 성도들과 함께 나와 설립한 교회이다. 고신교회가 형성되던 시기에 회관도 사무실도 없어 한상동 목사 사택이 회의실이었고, 김차숙 여사는 전국에서 모여들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방문에 무수히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문창(송상석)과 진주(황철도), 거창(주남선)교회 등도 경남(법통)노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부산, 마산, 진주의 경남(법통)노회가 중심이었던 고신교회의 교회쇄신운동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지방은 고려신학교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서문교회에서 제명당한 다섯 명을 지지하는 성도들이 설립한 서문로교회가 중심이었다. 설립 초기에 김주오 장로가 고향 땅 다섯 마지기를 팔아 첫 교회당이 확보되었고 바로 자립 단계로 접어들었다. 서문로교회는 초대 오병세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매년 교회의 11조, 12조, 13조를 여러 차례 분립교회와 미자립교회 지원에 사용, 경북지방 진리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53년 5월 19일 대구지방회와 경안지방회가 경북노회를 조직했다. 경북지방회는 목사 9명, 장로 11명, 모두 20명이었고, 대구, 김천, 경주, 안동 시찰을 두었다.

경주와 포항을 포괄하는 경동지방은 경주교회 윤봉기 목사가 중심이었다. 해방 후 1946년 9월 20일에 경주중앙교회 윤봉기 전도사가 제직들과 논의해 출옥성도 이인재, 황철도 목사와 박인순 전도사 등을 초빙해 부흥회를 열었는데, 노회에서 윤봉기 전도사와 황성학, 우승만 등을 30여 명을 제명하면서 10월 12일 경주교회가 시작되었다. 경주 YMCA이사장을 지내기도 한 황성학 장로(황만선, 은선 목사, 중선 장군의 부친)는 총노회 창립부터 3회기 부회계를 맡았는데, 교회와 지역교회를 위해 귀한 헌신을 했다. 경주교회가 1,200평의 신사 터를 불하받으면서 윤봉기 목사의 집을 처분하였고, 황성학 장로는 내보내야 하는 신사지기에게 자신의 집를 내어주고 교회 안으로 이사를 하였을 정도로 헌신해 초기 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윤봉기 목사와 경주교회는 교회당 건축을 미루고 진리운동의 확산을 위해 봉사, 경주, 포항, 영천 지역에 개척교회 23개가 설립되었다(박헌찬 목사, 경동노회 40년사). 그 시기에 경주교회는 포항대흥교회를 개척하였는데, 훗날 총신대 총장을 지낸 정성구가 1951년 설립 초기에 대흥교회에 출석하고 SFC수양회에 참석하며 신앙의 골격을 갖추었고, 승동측과의 합동기에 신학을 공부하고 네덜란드 유학을 거쳐 한국교회를 위해 크게 봉사했다.

그 시대 신사 터를 구입했던 경주교회나 사찰을 구입했던 서문로교회는 예배당에 대한 혁신적인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신교회 초기 지도자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고 우상에게 절한 사람이 문제이지, 건물은 수리하여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우상숭배에 쓰여졌다는 이유로 예배당을 불태우기도 했던 재건교회의 극단성과는 대비되는 것이었다.

경안지방에는 1951년 11월 이희명, 황병집 집사(황수섭 목사 부친) 등 16명이 안동교회(당시 안동중앙)에서 나와 남문교회를 설립했고, 이맹희 목사(김성수 총장 장인)와 오정수 장로가 운산교회를 설립해 통합측 강세 지역에서 경안노회 형성의 초석을 놓았다.

서울지역은 서울(명신익), 중앙(전칠홍), 동일(현 충현, 김창인), 명륜(이병규), 아현동(김현봉) 등 10여 교회가 개척되어 큰 성장을 이루었다. 이들중 다수의 목회자들은 이북 출신이었다.

전라지방은 1947년 설립된 루문동교회(현 광주은광)가 중심교회로서, 1980년대 말까지도 영호남간 교통이 불편하여 총회나 교단적인 행사나 각종회의에 참석도 여의치 않았지만, 귀한 헌신을 하였다.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교회를 목회하면서 여수지역은 충무동교회가 1951년 설립 이후 1980년대까지 고신의 중심교회였는데, 양진환 장로는 고신후원회장을 맡아 호남의 평신도 대표격으로 봉사하였다.

고신교회의 교회쇄신운동은 이렇게 각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52년 총노회 발회 후 총회측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4년 후 총회로 승격될 때는 부산 경남 진주 387, 경북 112, 전라 24, 경기 42교회 등 여섯 노회, 565교회로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교회쇄신운동의 큰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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