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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19. 고려신학교, 송도 교정의 조성


다큐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19. 고려신학교, 송도 교정의 조성

1946년 9월 20일 부산 일신여학교(현 금성고등학교)에서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한 학기 만에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다시 한 달 만에 1947년 봄 광복동에 있는 일본척식은행(산업은행의 전신) 사원 기숙사로 사용되던 건물을 구입해 이전했다. 신학교는 잦은 이사로 ‘보따리 신학교’라 별명이 붙여졌다. 사원 기숙사였으니 주택에 가까운 구조여서 학교 건물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8년 동안 신학교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고려신학교가 광복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강의실과 강당, 기숙사가 준비되어 본격적인 신학교육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한명동 목사는 ‘이 시기부터 고신성이 움트게 되었다’고 했다. 광복동 교사는 초기 고려신학교의 특별한 위치를 점하였다.

이때는 나라도 국민도, 교회도 신학생도 모두 가난해 학비를 내기도 버거웠고, 지방에서 교역하는 신학생들이 월요일에 도시락을 며칠 분의 도시락을 가져오면 곰팡이가 펴 물에 씻어 먹어야 할 정도였다. 신학생들은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목숨을 걸고 공부했는데, 기숙사에서 영양실조로 죽는 학생이 나오기도 했다.

광복동 교사는 한국전쟁 기간에 임시수도 부산시청 앞 용두산공원 입구라 부산의 명동과 같았고, 광복동 미화당백화점과 미국문화원이 가까이에 있었다. 이곳은 국제시장으로 바로 연결되었고,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과도 가까웠다. 그러나 그 공간이 협소하여 신학교가 장기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총회측과의 갈등을 지나 독립교단이 된 이즈음 학교가 안정되고 사명을 가진 학생들이 꾸준히 모이면서 장기적으로 적당한 교사를 준비해야 했다.

고려신학교는 학교의 장기적인 발전을 모색하던 가운데 새로운 교사 마련하기로 하였고, 그 책임은 한명동 목사에게 주어졌다. 그는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에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 1만 3천 평을 확보하면서, 신학교에서 8천 평을 사용하고 복음병원에서 5천 평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그곳은 해운대해수욕장이 본격화되기 전 부산의 대표 해수욕장이던 송도해수욕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영도 너머로 태평양으로 나아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송도는 또 부산 중심가에서 멀지 않으면서 천혜의 자연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땅을 확보하기 위해 기성회원들이었던 박봉화, 주태화, 주영문 장로와 이성태, 김선애 집사 등이 앞장서 헌금하였다.

송도교정 부지는 야산이어서 산을 깎고 토목공사를 거쳐 교실, 행정동, 기숙사 등 교사 3동을 연건평 594평을 건축하였다. 돈이 없었던 그 시대에 각 지역의 고신교회들은 대부분 총회측에 넘겨 주고 빈손으로 시작하였거나 모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송도교정 조성을 위해 토목공사를 해야 했고, 한국전쟁 후 한국의 공익 기관의 시설을 지원하던 주한 미국 군사원조단의 도움을 받았다.

미국 개혁교회의 재정지원과 함께 공사 기간에는 고신교회 성도들은 신학교 건축을 위해 기도하였고, 부산과 경남, 대구 등 여러 교회에서 성도들이 동참하여 벽돌을 나르고, 공사를 돕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교수들이 월급 주기도 걱정을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공사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교회들도 돈이 없어 몸으로 봉사한 것이었다. 서문로교회의 경우 여성도들이 주간 동안 내려와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잠을 자며 공사를 도왔다(서문로교회 60년사). 함께 게제하는 몇 장의 사진들은 그 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고신교회에서 공적인 예배에 고려신학교와 복음병원 등 교단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들이 많았다. 교회와 함께 가는 신학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고려신학교는 1954년 3월 새학년도에 맞추어 신학교를 이전, 송도시대를 열었다. 고려신학교는 이 시기부터 더욱 안정적인 신학교육이 가능하였다. 1956년에는 고려신학교 개교 10주년이 되던 해로 희망찬 기운을 갖게 되었다. 이후 송도는 고신교단의 성지와 같았다. 외국 교수들이 방문해 강연할 때는 전국의 목회자들이 계속교육의 기회로 삼아 함께 참석했다.

이렇게 조성된 송도 교사가 위기에 봉착했던 때가 있었다. 1959년 WCC 회원권 문제와 박형룡 교장 3천만환 사건이 일어나 장로교 총회는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분리된 후 승동측이 고신측과의 합동을 제안했고, 박윤선 교장이 떠난 신학교육의 위기 상황에서 고신측도 적극적으로 협의해, 1960년 12월에 두 교단의 합동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합동하면서 합동위원회에서 신학교를 단일신학교를 운영하는 ‘단일화’하는 것으로 제안되었다가, 송상석 목사의 기지로 한 이사회가 두 신학교를 운영하는 ‘일원화’로 결정되어, 신학교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이후 고려신학교는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로 개편되었는데, 합동 이듬해 고려신학교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고려신학교 학생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고, 제47회(1962) 총회 후 합동 전 이사장이었던 한상동 목사가 복교를 선언하면서 고려신학교는 폐교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때 잘못했으면 신학교가 폐쇄되고 재산마저 모두 날아갈 뻔했다.

고려신학교는 복교 이후 박손혁,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가 중심이 되어 자리를 잡았고, 1969년에 대학 학력 인정 각종학교 인가를 받았으며, 1971년 고려신학대학 인가를 받으면서 학사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이 되었다. 필자가 처음 송도 캠퍼스를 방문했던 것이 부산시고교SFC연합회 수련회(1972) 때였는데, 대학의 건물이 시골 초등학교와 같아 대학 건물이 왜 이리 초라한가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 인가 후 이에 걸맞는 대학 건물이 필요로 하게 되었고, 1975년 대학에 입학해 1954년 건축한 그 교실과 기숙사에서 한 학기 생활했다.

그동안 고려신학대학은 국내교회의 헌금과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도들의 헌금으로 1974년 8월에 기공하여 1년 만에 1975년 8월에 준공, 2학기부터는 송도 본관에서 공부하였다. 1954년에 건축했던 이 건물들은 송도 캠퍼스 신관(1980)을 건축하면서 강의동과 행정동이 허물어졌고, 운동장을 주자장으로 정비(1993)하면서 기숙사동이 마지막으로 철거되었다.


*링크로 연결하면 관련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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