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2.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전개
- 작성자 : 나삼진
- 22-02-10 11:19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
2.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전개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1938)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 한국교회는 극심한 위기속으로 빠져들었다. 신사참배가 강요될 때 이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났다. 먼저, 소수의 친일교계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였다. 당시 총회장 홍택기, 부총회장 김길창 등이 그러한 그들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무단 통치 환경에 순응하였던 다수의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중에 많은 사람이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다고 생각했겠지만, 제국주의가 강성한 현실에서 성경보다는 상황을 받아들였으며,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하며 부끄러운 목회를 해야 했다. 이들 중에 의식이 있는 목회자들은 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해방 후 교회를 사면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 교회쇄신운동에서 중도파로 존재하였다. 또한 소수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가 십계명 제1, 제2계명을 위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설교했고,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투옥되었다.
제27회 총회가 끝난 후부터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반대하고 본격적인 반대운동이 시작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네 갈래로 전개되었다. 이기선 목사가 중심이 된 평안북도 지방은 신의주 김화준, 이광록, 김창인 등, 강계 고흥봉, 서정환 등, 선천 김린희, 김의홍, 박신근 등, 정주 김형락, 박천 안이숙, 영변 박관준 등이 중심인물들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중심이 된 평안남도 지방은 평양의 채정민, 김의창, 이주원, 방계성, 오윤선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함일돈, 마두원 선교사의 협력이 있었다.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방은 부산 손명복, 조수옥, 박경애, 배학수 등, 마산: 최덕지, 태매시 선교사, 이약신, 이찬수 등, 함안 이현속, 거창 주남선, 진주 황철도, 이봉은 등, 하동 박성근, 창녕 한영원, 통영 최덕지, 밀양 박수민 등이었다. 한부선 선교사가 중심이 된 만주 지방은 김윤섭, 박의흠, 김형락 등이 있었고, 특히 만주에서는 장로교 언약문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수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가 중심이 되어 전라남도에서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제27회 총회 결의 이전에 경남노회에서 주기철 목사의 제안으로 신사참배 반대 결의를 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만열 교수는 노회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 신사참배 강요가 있기 이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주기철 목사의 성격으로 볼 때 신중한 입장을 갖는다. 그러나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 경남노회도 이를 따랐는데, 부산경남을 선교지역으로 한 호주선교부와 갈등이 조성되기도 했다.
제27회 총회 이후 전개된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경남지방이 가장 강력했는데, 그것은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을 배출하였고, 이들의 신앙적인 영향력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남지방에서는 현노회 해체운동을 전개한다, 신사참배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않는다,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들만의 새로운 노회 조직한다, 동지들간의 상호 원조를 도모한다, 그룹 예배와 동지 획득에 주력한다는 다섯 개 항의 운동 원칙으로 추진하였다. 1940년 7월경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주도적인 인물들의 일제검거로 반대운동의 큰 흐름이 중단되었다. 그 시기에 박수민 장로의 자녀들은 신사참배 거부로 퇴학을 당했고, 투옥된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아와 같이 살아야 했다. 병보석으로 풀려났거나 투옥되지 않았던 지도자들은 목회에서 인퇴하여 초야에 묻혀 인고의 세월을 보내어야 했다.
제27회 총회 이후 신사참배 강요가 거세어졌고, 반대운동도 더욱 가열차게 전개되자 이것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일본제국주의는 1940년 7월경 일제검거로 반대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들중 다수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어 6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한상동 목사는 옥고기 ‘주님의 사랑’에서 “경남 도경찰부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시절에 인생으로서는 차마 견디지 못할 어려움을 당하였다”고 했고, 평양감옥에서 추위와 병마와 싸워야 했다.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만나게 된다. 첫째, 1939년 여름 수영해수욕장 바닷가에서 수양회를 가진 일이다. 한상동 목사와 십여 명의 동지들은 낮에는 경찰의 눈을 피해 수영을 하고, 밤에는 기도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 전략을 마련하였다. 이 수양회로 경남지방의 반대운동이 조직화되었다. 이때 마련된 반대운동 전략이 경남전역은 물론 평안도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주기철 목사의 반대운동이 개인적이었다면, 한상동 목사의 반대운동은 조직적이었고, 그것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둘째, 주기철 목사가 병보석으로 일시석방되었을 때(1940) 한상동 목사가 평양으로 가서 이북지방의 동지들을 만나 반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로써 남북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힘을 합치게 되었다. 이주원 전도사가 남북간 연락책이었다. 일본 검찰의 기소내용에 한상동 목사의 ‘범죄사실’이 함께 기소된 16인 가운데 가장 많이 적시되는데, ‘범죄사실’이 60항에 걸쳐 열거되고, 다른 이들을 교차 체크할 때 모두 68개 항으로 나타난다. 한상동 목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일본 검찰이 그 운동의 치열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된 사람들 곁에는 이들을 지원한 ‘옥문밖의 사람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일제검거로 지도자들이 평양감옥에서 옥중투쟁을 하고 있을 때,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는 6년 동안 평양에 거주하면서 한상동 목사와 함께 투옥된 이들을 위해 옥바라지를 했다. 당시의 감옥에서 장기수는 곧 죽음을 의미했고, 이들에 대한 영양 공급이 충분치 않아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이들은 폐결핵과도 싸워야 했고, 철따라 옷가지들을 넣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옥문밖의 사람들’에는 트럭 운전사 출신 이경석도 있었는데, 그는 훗날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 고신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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