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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3. 1940년대 한국교회의 부일과 배교


3. 1940년대 한국교회의 부일과 배교

영화 ‘암살’의 마지막 장면에서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이었다가 변절해 동지들의 명단을 일제에 넘긴 연유로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된 염석진(이정재 분)은 암살되기 직전 자신의 변절에 대해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라고 말한다. 다수의 친일변절자들이 그같은 생각이었다.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일제의 강성으로 국민들의 독립의지도 많이 약화되었고, 그 결과, 1930년대 중반부터는 각 분야에서 친일세력이 확산되고, 더욱 강력한 진용을 갖추었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던 최남선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많은 인물들이 친일로 돌아섰고, 정치가, 군인, 법관은 물론 이광수, 모윤숙 등 문인, 김활란, 백낙준 등 학계 인사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친일·부일에 앞장섰다. 극소수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한 일은 기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한국장로교회는 급격히 무너졌다. 총회 결의 후 12월 12일 장로교 홍택기, 김길창, 감리교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 이명직 등 한국교회 대표단은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을 참배했다.

1939년 4월 제국의회에서 종교단체법을 통과한 후 신사는 종교의 범위를 벗어나 헌법 차원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40년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의 부일과 배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들은 친일 문필활동은 물론 학병과 정신대 동원과 전쟁물자 수집과 모금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한국 장로교회에서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이후 1940년대에는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졌다. 애국기 헌납 헌금, 시국강연회, 전승축하대회, 교회 통폐합, 일본적 기독교화 추진, 교파 통폐합 등에 앞장서 부일과 반민족적 배교의 길을 걸었다. 장로교는 교회 헌금이 전쟁무기 헌납에 사용되었고, 김종우 감독이 일본 신사참배 후 돌아와 급사하자 그 감독직을 이어받은 정춘수는 각 지방의 교회들을 통폐합해 교회당 매각대금으로 비행기 헌납금을 마련하기로 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배교에 앞장섰다. 교회의 이러한 처사로 뜻있는 신자들은 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해방 때까지 가정예배를 드렸고, 장기려 박사도 그중 하나였다.

그 시기의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고 성경해석과 설교도 일본정신에 부합하도록 해야 했고, 그리스도가 왕이심을 선포하는 찬송들이 다수 지워졌으며,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낭독을 하면서 예배했다. 학교나 교회에도 ‘가미다나’를 설치해 예배와 공부 전에 이에 대한 예를 표한 후 예배나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수많은 교회가 통폐합되었다.

1942년 10월 평양서문밖교회당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1회 총회 회의록에는 1940년대 한국교회의 부일과 배교가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알게 한다. 첫째, 1941년 조선장로교회에서도 애국기 헌납기성회가 조직되고, 그 모든 활동이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을 통해 이루어졌다. 충청노회는 82개 교회 가운데 80교회의 종을 헌납하였고, 수 만의 유기그릇도 헌납되었다. 1941년 10월부터 1년 동안 전국적으로 수납된 종은 1,540개였다. 교회종이 녹여져 무기생산에 쓰인 것이다. 창녕제일교회도 종을 경찰서에 빼앗겼다가 무기공장으로 옮겨지기 전에 해방이 되어 경찰서에서 종을 찾아오기도 했다. 둘째, 전국 노회 단위에서 시국강연회와 전승축하대회를 개최했다. 대부분의 노회에서 국어(일본어) 강습회를 개최하였고, 전쟁에 나간 장병들을 위해 위문품과 위문금을 보냈다.

셋째, 일제의 교회통폐합으로 1941년 3,624교회에서 이듬해 2,543교회로 줄어들었다. 총회보고서에 의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본 노회가 경남노회로 335교회 중 108교회가 감소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총회연성국장이면서 경남교구장이던 김길창 목사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넷째, 일본적 기독교 추진이다. 일제는 교회를 일본적 기독교로 바꾸기로 혈안이 되었다. 목사가 귀해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와 지역교회를 돌보았던 시기에 일본적 기독교 완성을 위해 순회하는 목사를 두기도 했다. 다섯째, 교회의 헌금으로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무기를 공급하였다.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장로교 신도 애국기 헌납기성회와 협력하여 1942년 2월에 육해군에 애국기 한 대 또는 기관총 7정의 지금으로 15만여 원을 헌납하였다. 선상전투기 한 대와 육군 기관총 두 정은 ‘조선장로호’로 이름을 붙였다. 여섯째, 한국기독교의 교파의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 조선 교단 등 다섯 교단이 중심이 되어 구성했다. 1945년 해방을 불과 두 주 앞두고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을 창설하면서 비신앙적이고도 몰역사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허순길 교수는 이러한 한국교회를 두고 “배교교회”라 불렀다. 제27회 총회부터 1945년까지 순정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나선 총회로 보고, 백귀난행, 부일협력, 신사참배 항거자 축출, 일본적 신학교 설립이 이루어졌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창설로 일본적 기독교가 완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투옥된 주기철 목사가 면직되고, 친일 조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그 시대와 같은 우상숭배 강요는 없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우상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에 어떤 우상들이 우리의 삶과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이를 거부해야 하고, 또 청산해야 한다. 초대형교회들에서 끊이지 않는 재정비리, 유명 목회자들의 추문, 한국교회에 만연한 과도한 연합기관과 감투들, 총회나 기독교 기관의 비상식적인 운영, 역량을 넘어선 거대한 예배당 건축과 이로인해 이단에 넘어가는 교회당은 한국교회가 돈과 명예와 욕망과 권력의 우상을 섬기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처절히 무너진 한국교회의 범죄의 엄중함을 깨닫고, 이를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사로잡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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