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역사 아카이브] 4. 해방 정국과 혼돈의 한국교회
- 작성자 : 나삼진
- 22-02-14 20:48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
4. 해방 정국과 혼돈의 한국교회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평양감옥에 옥고를 치루던 한상동 목사는 옥중에서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도 곧 망할 것을 예상하였다. 이때부터 그가 한 세 가지 기도제목은 해방 후 대한교회를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교역자를 양성할 것, 전도인을 길러서 교회를 설립할 것, 수양원을 설립하여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신앙양심을 더럽힌 교역자들을 수양시켜 새출발하게 할 것 등이었다. 같은 죄수로서 만날 수도 없었지만 주남선 목사도 이 시기에 비슷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도는 해방 후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나타났고, 해방 후 한국교회 쇄신운동은 감옥에서부터 싹이 심겨진 것이었다.
1945년 8·15해방 전후에 한국교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1940년대 한국교회에서는 친일·부일이 심각하였고, 그 정점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모든 교파를 하나로 묶어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조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해방 불과 세 주 전인 7월 20일의 일이었다. 해방 후 대한교회의 미래를 내다보며 특별히 기도하였던 옥중성도들과 달리, 친일부일 교계인사들의 역사의식과 영적인 통찰력은 무척이나 무디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적으로 수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기독교계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2천여 명이 투옥되고, 50여 명이 순교했으며, 곧 처형을 기다리던 이기선, 한상동 목사 등 17명의 지도자들이 평양감옥에서, 손양원과 여러 지도자들도 각기 다른 감옥에서 섭리적으로 출옥하였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큰 혼란 가운데 있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지를 받아 김일성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한경직 목사와 윤하영 목사 등은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지만, 소련군정의 실시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월남하였다. 1946년 북한 총선거를 계기로 공산당 집권에 방해가 될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비서 강양욱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여 교회의 가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많은 교계지도자들이 미군정에 참여했고, 정부 수립과 국회 개원 때는 다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 국회와 정부 출범에 기독교 인사들이 많아 마치 기독교정부와 같았을 정도였다. 국회 개원시에 목사 출신 이원영 의원이 기도로 시작한 것도 그와 연관이 있다.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였던 김관식 목사는 해방 후 조선교단의 기구적 재건을 시도하였지만, 감리교가 반대하고 이탈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남한의 노회들만으로 남부대회(1946)를 열어 대회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부일세력들이 반성과 자숙 없이 해방 후에도 여전히 한국교회 지도자로 행세한 것이었다. 이는 나찌에 협력하였던 독일교회 지도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지난날의 잘못을 확인하는 고백서를 발표하고, 자숙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던 것과는 대조적인 일이었다(김영재, ‘한국교회사’ 287).
해방정국에서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한국교회 쇄신운동 과정에서 몇 가지 흐름을 보였다. 먼저 평양감옥에서 나온 출옥성도들은 오랜 옥중생활로 약해진 건강에 바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또 해방 후 한국교회 재건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주기철 목사가 사무하다 투옥, 면직되었던 산정현교회에 모여 해방 후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해 두 달 동안 기도회를 갖고 다섯 개 항의 한국교회의 재건 방안을 마련했다 그들은 9월 20일에 제시한 교회쇄신방안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 목사와 장로의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이것을 실행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이었다.
둘째, 경남노회 목회자들은 1945년 9월 2일 20여 명의 지도자들이 부산에서 모여 연합예배를 드린 후 교회 재건과 노회 복구를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9월 18일 경남재건노회를 구성하고 교직자들은 사면하고 자숙기간을 보낸 후 시무투표로 진퇴를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방안은 출옥성도들의 발표 이전에 발표된 것이라 의미있는데, 이 정도는 그리스도인의 상식 수준이었다. 11월 3일에 주남선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택하고 교회쇄신에 박차를 가하였으니, 친일지도자들의 교묘한 책략으로 혼돈에 빠져야 했다.
셋째,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한 훗날 재건교회는 교회당에서 우상숭배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교회당을 불태우고 새로 깨끗한 교회를 지어바치자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기성교회나 신자들과의 교류를 동참죄로 규정하고 금했다. 한부선 선교사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투옥까지 되었던 신앙동지였지만, 기성교회와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교는 물론 인사도 시키지 않았다. 이들은 1948년 2월 30여 교회가 모여 중앙위원회를 발족해 사실상 교단으로 형성되었다.
넷째, 이북지방에서 평북노회 주관으로 1945년 11월 14일부터 한 주간 선천의 월곡동교회에서 평북지역 6개 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개최되었다.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강사 박형룡 박사는 산정현교회에서 논의된 재건원칙을 발표했지만, 신사참배 결의 당시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강력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1945년 11월 14일 이북5도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통일이 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잠정적인 협의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했다.
다섯째, 이기선 목사는 기독교연맹의 강압이 계속되자 1949년 5월경 출옥성도들의 재건원칙을 온전히 따르는 30여 교회들을 규합해 독로회를 구성하였다. 이는 해방 후 한국교회의 첫 분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찬송을 부르며 신앙의 자유를 노래했지만, 모든 것이 밝고 희망찬 것만은 아니었다. 해방정국은 혼돈속에서 정치적으로 미국군정에 적응해야 했고, 이념적으로는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계속되었으며, 신앙적으로도 신사참배를 한 다수파와 이에 저항하고 승리한 출옥성도들간의 리더십 문제가 큰 숙제였다. 국가적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해 민족정기가 흐려졌던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도 친일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해 신앙의 정기가 흐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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