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교사 열전] 45-1 William Hunt (한위렴) 선교사 ①
- 작성자 : Henry Park
- 20-08-13 20:46
한위렴 선교사 (William Hunt) 1897년 입국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평양선교를 위해 마포삼열(Samuel A. Moffett,18 6 4~193 9) 선교사를1890년 파송하였다. 그후
1897년에는 황해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한위렴(William B. Hunt,1869~1953) 선교사를 재령 선교를 위해 파송하였다.
한위렴 선교사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더불어 서북지역의 기독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조선(한국)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대를 이어 후손들이 조선(한국)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장로교 선교사
가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 가문, 모펫(Moffett) 선교사 가문, 안의화(Adams) 선교사 가문,
린턴(Linton) 선교사 가문, 그리고 헌트(Hunt) 선교사 가문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위렴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 신앙과 선교적 비전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620년에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비국교도 청교도 존 헌트(John Hunt)의 후손이다. 한위렴 선교사는 1897년 조선(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받아 그의 첫 안식년을 갖기까지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한위렴 선교사는 평양에 머물면서 재령에 선교본부가
세워지기까지 그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회전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재령 선교를 위한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
재령은 당시 도청 소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였던 해주나, 교통의 중심지였던 사리원보다는 선교사들이 여러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용이하게 만날 수 있는 조그만 읍이었다. 바로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재령을 선교의 중심지로 선택한
것이다. 재령을 개척한 선교정신은 바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개념’ 때문이었다.
마포삼열 선교사와 한위렴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장로교 신앙고백과 신조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교리
교육을 강조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들을 철저한 교육을 통해 양육하는 것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시행하였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장로교 신학의 기반인 칼빈주의와 신조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미국 청교도들과
장로교회가 추구했던 원리를 초기부터 조선(한국)교회에 적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로교회의 전통과 체제를 확립해나갔다.
장로교회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마포삼열 선교사는 자진전도와 자력운동 그리고 자주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조선(한국)
장로교회의 중요한 특성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마포삼열 선교사의 선교에는 배후에서 활동한 한석진 목사의
동역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선교의 비전을 황해도 재령에 실현되도록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마포삼열
선교사의 동역자, 한위렴 선교사였다.
한위렴 선교사와 한부선 두 부자(父子)와 평생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박윤선도 북한 개척선교 당시에 한위렴 선교사처럼
널리 복음을 전파한 이는 없으며, 네비우스 선교방법의 확고한 제창자로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언급하였다. 한위렴 선교사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이야말로 신약성경의 전도원칙이며, 조선(한국)교회가 자립하는 첩경이고,
조선(한국) 성도들을 훈련시켜서 지도자와 전도자, 그리고 해외로 나가 사역할 선교사들까지 양성할 실천적인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성경연구에 근거한 자립, 자치, 자전의 원리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조선(한국)
장로교회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세워 나갔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revpark001@gmail.com
댓글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