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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42. 오랜 숙제, 신학대학원 천안 이전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42. 오랜 숙제, 신학대학원 천안 이전

1946년 9월 20일 일신여학교 교실 하나를 빌어 개교한 고려신학교는 이듬해 3월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옮겼고, 한 달 후 광복동 교사로 이전, 이곳에서 9년을 지냈다. 광복동 교사는 당시 부산시청 건너편 용두산공원 아래에 있었는데, 강의실, 강당, 기숙사가 거의 하나가 된 기숙형 학교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신학교 초기 사진에 용두산 신사의 무너진 석주가 배경이 된 사진들이 남아있다.

한명동 목사는 1949년 10월에 영도교회를 사면하고 부산남교회를 개척하며 본격적으로 신학교 행정과 기숙사 관리 책임을 맡아 ‘MP’라는 별명을 들으며 학생들의 경건훈련을 담당하였다. 그는 이 시기부터 ‘고신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려신학교 학생 수가 늘어나면서 좁은 공간이 한계가 있어 새로운 교사를 마련하기로 하고, 한명동 목사 책임하에 1954년에 송도 교지를 확보하고, 미국군사원조단(AFAK)의 지원과 고신교회 성도들의 헌금과 현장에서의 근로봉사로 교사를 마련하였다.

1956년 새학기에 교사를 마련하여 부산 송도에 정착한 고려신학교는 고신교회의 센터가 되었고, 1989년 33년만에 천안으로 옮겨가 보금자리를 폈다. 고려신학대학원의 천안 이전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교단적으로는 고려신학교 서울 이전 논의가 꾸준히 지속된 결과였다. 이런 논의는 초기 박형룡 박사 교장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평양에 있었지만, 경남에서도 당시의 그 불편한 교통편으로라도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되면서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한 고신교회는 4대 장로교단이지만 지방교단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던 경기노회는 제21회 총회에 서울 이전 청원을 하여 이사회에서 연구 보고하기로 하였고, 제22회 총회에서 교단발전연구위원회에서 연구하기로 하였지만, 제24회 총회에서 송도에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신학교 서울 이전은 송도 본관 신축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송도 교정이 한계에 이르면서 제36회 총회(1986)에서 신대원을 수도권으로 이전하기로 결의하고 이사회에 맡겼다.

신학대학원 천안 이전의 다른 이유는 의예과가 의학부로 성장하면서 송도캠퍼스는 신학교육의 현장으로 기능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송도 캠퍼스가 초기에는 신학교와 병원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지만, 1960년대 이후 복음간호전문대학의 성장, 1980년 의예과 신설과 병원의 확장, 고려신학대학이 학과가 늘어나 고신대학으로 몸집이 커지면서 송도캠퍼스는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도 캠퍼스를 조성하였지만, 대학 구성원들의 총의가 모아진 것이 아니어서 1982년에 교사를 준공하고도 한 해를 지나 이전해야 했다. 1984년에 대학 본부가 영도로 옮겨갔고, 신학대학원의 천안 이전도 추진되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고려신학교 서울 이전이 청원되었지만, 서울 소재 대학이 지방에 캠퍼스를 조성할 수는 있었지만, 지방대학이 서울 시내에 분교나 대학원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 사이에 의학부 학생들이 점차 의학과 4학년까지 진급하면서 병원과 의과대학이 송도캠퍼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신학대학원의 수도권 이전도 구체화되었다. 신학대학원은 1989년 1학기에 서울고려신학교가 자리잡았던 인천교정에서 수업하였는데, 교사의 위치나 시설의 한계도 있었지만, 신학대학원 위치 변경 허가를 받지 않아 교육부의 ‘시정 촉구 지시’로 무산되었다.

이에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회에서는 고신대학의 교육여건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교육부 당국과 협의한 결과 신학대학원이 천안에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는 의견을 받아 이를 추진하였다. 신학대학원 이전은 이사회. 교수회, 학생 등 구성원들의 합의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고려신학대학원장 김병원 박사가 이사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사장 곽삼찬 목사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 김병원 원장은 교지의 구입 후 토목공사가 진행중에 고신대학장으로 부임해갔다.

천안캠퍼스의 조성은 신학대학원 측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어서 신학대학원의 규모에 비해 강의동, 행정동, 강당, 도서관, 생활관, 교수동을 갖춘 큰 규모가 되었다. 신학생의 전원 기숙사 생활이 이루어져, 최상의 신학교육의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로써 대학 본부는 영도 캠퍼스에, 신학대학원은 천안,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부속병원은 송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의 천안 이전을 기해 학우회에서는 고려신학교의 사료들을 ‘만남’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남겼다.

신학대학원의 천안 이전으로 부산경남지방 교회에서 봉사하는 학생들은 이전과 달리 시간적으로, 재정적으로 많은 희생을 해야 했고, 교회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신학생들이 주초에 천안으로 이동하고 주말에서야 교회로 돌아왔기 때문에 사역에도 한계가 많았다.

신학대학원이 천안에 자리잡으면서 수도권 대학 졸업생들이 신입생으로 다수 유입되기 시작했고, 졸업 후에는 수도권이나 중부권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이 많아졌다. 오랫동안 부산, 경남, 울산, 대구, 경북 등 다섯 지방자치단체 지역에 고신교회의 70%가 분포하였지만, 차츰 그 비율이 줄어들어 지금은 60% 중후반대가 되었다. 2001년 고려측이 영입되면서 서경노회가 창립된 것이나, 제65회 총회(2015)를 기해 고려측과의 합동으로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에 산재한 교회가 많아 고신교회의 영남편중성이 다소 완화되었다.

이러한 일에는 서울영동교회와 잠실중앙교회의 분립 개척과 남서울교회 등 서울 중심교회들의 연합 개척운동도 한몫을 하였다. 신학대학원이 천안에 정착한 후부터 졸업생들이 수도권과 중부지역 개척교회가 이루어졌고, 고신교회의 수도권 지역 보강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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