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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 이야기

[고신역사 아카이브] 52. 교단 분열과 형제들과의 재결합, 그리고 타교단과 합동 추진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52. 교단 분열과 형제들과의 재결합, 그리고 타교단과 합동 추진

법정 소송문제는 고신교회 70년 역사 가운데 아킬레스건과 같다. 초기에 소송 문제로 경기노회 보류파의 이탈이 있었고, 송상석 목사 징계 이후 경남(법통)노회가 나뉘어졌던 일부가 오랫동안 ‘반고소 고려파’라는 이름으로 있었다.

학자들은 고신교회의 신학을 정초한 박윤선 교장이 고신교회를 이탈한 것을 주일성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소송 문제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총회파의 문창교회 명도 소송에 대해 송상석 목사가 대응하면서 오래 공방을 하면서 대법원까지 올라갔고, 전국교회의 이슈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박윤선 교장은 제6회 총회(1956)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고, 고신교회 안에서도 갈등의 한 요인이 되었다. 박윤선 교장은 이 문제로 교장직을 사임, 서울에서 개혁신학원을 설립하였다가 돌아왔다. 그는 그 시기에 ‘파수군’에서 송상석 목사와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경기노회 보류파는 소송 문제에 대해 박윤선 교장과 입장을 같이 하면서 제7회 총회(1957)에 헌의안을 제출했으나 명쾌하게 처리되지 못해 총회 후 행정 보류를 하였고, 이듬해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았다. 당시 행정보류에 함께한 17교회는 훗날 고신측이 환원한 후 합동측에 합류하거나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이 합동측에 합류한 후에 소송 문제에 대해 침묵한 것을 볼 때, 그 이탈이 목회자들의 지방색과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1972년 9월 제22회 총회 후 고려학원 이사장 4년 임기를 마친 송상석 목사가 문교부의 승인기간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법적 이사장직을 주장하며 사무인계를 하지 않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가 재임하던 기간에 교수 파동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여파로 제24회 총회에 경북노회가 ‘송상석 목사 비행에 대한 처리건’을 헌의해 특별재판국이 구성되었다. 특별재판국은 1974년 12월 4일 그의 면직을 결의하였고, 이후 총회를 지지하였던 경남(정화)노회를 제외한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를 이탈하였다. 송상석 목사는 총회의 관례로나 국가의 실정법적으로나 문제가 있었지만, 네 차례 총회장을 역임했던 은퇴목사에 대한 과도한 징계라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총회를 이탈한 경남(법통)노회는 ‘반고소 고려파’ 경기노회 일부와 합쳤다가 두 해 만에 갈등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교단 창립 30주년 대성회(1979)에서 이탈한 형제들과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제29회 총회에서 이탈한 형제들 영입 교섭위원을 내었다. 1980년에는 평신도들이 ‘고신교단 하나되기운동’을 기도회를 갖고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제31회 총회에서 ‘이탈한 형제가 돌아올 때 각 노회는 과거를 불문하고 사랑으로 영입하도록 하다’는 결의를 하였고, 1982년 양 교단 합동의 형식으로 총회로 복귀했다. 이에 11월 16일 고신대학에서 대회장 서완선 목사의 사회로 고신교단 합동 경축대회를 개최했는데, 고신대학장 홍반식 박사가 ‘예수교회의 승리’라는 설교를 하였다. 경축대회는 인쇄물이 인쇄된 후 한 주간 연기되어 개최된 것을 보면 마지막까지 협의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82년 복귀하지 않았던 교회들은 ‘반고소 고려측’으로 존재했는데, 탄탄한 목회와 강력한 리더십으로 교단과 신학교를 주도한 석원태 목사의 리더십이 교단 형성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리더십에 문제로 개혁의 요구가 생겨났다. 총회장을 지낸 조석연 목사 등이 17개 항에 이르는 건의문을 제출하였고, 이를 주도한 조석연 목사 징계를 추진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고신총회가 제50회 총회를 맞아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자 고려측의 총회 임원들과 각 노회장 연명으로 합동 추진에 대해 원칙적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후 고려측에서는 총회재판국에서 조석연 목사의 제명을 결의하고 인천노회가 이를 통보하였으나 교회와 목회자들의 저항을 받았고, 교단 내 개혁세력들은 교단 내 개혁이 무망하다는 판단에 따라 고려측을 떠나기로 결의하고, 2001년 4월 16일 선두교회수양관에서 서경노회를 창립하였고, 제51회 총회에 가입하였다. 서경노회가 창립될 때 54교회에 목사 66명, 선교사 5명이었다.

서경노회가 가입한 후 고려측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는데, 2013년을 전후하여 석원태 목사의 윤리적인 문제가 그의 가족에서부터 제기되었고, 고려총회가 징계를 논의하면서 경향교회가 노회에서 탈퇴, 고려총회와의 합동이 가속화되었다. 이에 제64회 총회 때부터 고려측-고신측 합동이 논의되기 시작해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모두 열네 차례 회의를 통해 고신총회가 고려측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합동의 의견일치를 보았고, 2015년 9월 15일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개회하여 합동을 결의하고, 제65회 총회에 합류하였다. 고신총회와 합동하면서 ‘반고소 고려총회 40년사’(2018)를 출간했고,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했다.

나뉘어진 형제들과의 일치와 달리 최근 10년 동안 교단연합을 염두에 두고 대화해오는 교단도 있었는데 합신측과 순장측이다. 합신측은 1980년 합동측이 교권으로 총신대학이 어려움을 겪을 때 박윤선 목사와 몇 신학교수들이 떠나 합동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듬해 합동(개혁)이라 칭하다가, 훗날 합신측으로 변경했다. 두 신학교의 초대교장이 박윤선 목사라는 정서적인 유대감이 있었고, 1990년대 이후 두 신학대학원의 꾸준한 교류도 한몫을 했다. 대화를 시작하면서 제62회 총회에서 교류와 협력의 단계 없이 성급하게 합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화했다. 신학교 학생교류, 교역자 교류, 교단적인 행사에 당사 교류 등을 결의했지만, 친교 자리에 머물렀다. 이후 뚜렷한 진전이 없어 2015년부터는 교류위원회로 단계를 낮추었다.

합신측과의 진전이 없게 되면서 총회 지도부는 2016년부터 순장측과의 교류를 시작했고, 교단합동을 염두에 둔 상호 교류가 시작되었다. 순장측은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이를 반대하였던 함남노회 이계실목사의 신앙을 따르던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신사참배 거부’라는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편이다. 그동안 현유광 교수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에 선임되어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교단 합동에 대한 내부의 반발도 적지 않아 진전이 없는 편이다.


*링크를 연결하면 사진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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